전태일기념관에서 전태일 열사의 친구 김영문씨(왼쪽)와 임현재씨 / 권도현 기자

cr. https://news.v.daum.net/v/20201111085744808

1968년 열여덟의 김영문은 평화시장 2층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전태일도 2층 공장의 재단사였다. 지방에서 올라왔고 가방끈이 짧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은 죽이 잘 맞았다. 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읽고는 이런저런 구상을 늘어놓았다. 그때 영문은 근로기준법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태일과 동갑인 임현재는 그해 평화시장에 발을 들였다. 1970년 전태일이 몇몇 재단사들을 모아놓고 노동조건을 개선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현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근로기준법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친구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스물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평화시장 앞에서 몸에 불을 댕긴 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스러졌다. 1965년 열일곱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 미싱사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올랐다. 아버지와 일터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됐다. 태일은 영문에게 재단사 모임을 만들어 노동조건을 개선해보자고 제안했다. 1969년 6월 10명 안팎의 재단사가 허름한 중국집에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름은 ‘바보회’라 불렀다. 업주들에게 기계 취급을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해 붙여진 이름이다. 계획은 그럴듯했으나 돈이 없었다. 태일은 “왜 우리는 대학생 친구가 없냐”는 말을 많이 했다. 우선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 한자가 가득한 근로기준법 책을 이해하기가 한결 쉬웠을 터였다. 그는 “안구를 기증해서라도 돈을 구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두세명은 죽어야 개선이 되지 않겠냐”라고도 말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노동실태 설문조사지를 돌렸지만 회수율이 저조했다. 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해고됐고 바보회도 흐지부지됐다. 그는 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만들었다. 삼동은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를 말한다. 김영문과 임현재는 삼동회의 일원이었다. 전태일은 다시 한 번 노동실태 조사를 벌인다. 결과를 토대로 노동청에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낸다. 이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자 정부는 노동문제 개선을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은 번번이 무시됐다. 화가 난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일대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기획한다. 시위 당일, 경찰이 한 건물에 모여 있던 삼동회 회원들을 막아서고 플래카드를 빼앗았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영문은 태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몇 발자국을 뗐다. 갑자기 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과의 약속대로 하루 8시간 노동, 주일 휴가, 이중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 8개 조항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가 거액의 위로금을 제시해도 끄떡없었다. 결국 노동청장은 노조 결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전태일 분신 사건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큰 사건인지 와닿질 않았는데 지금 기사를 읽고 보니 정말 우리나라 노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 같다. 최근 서울신문 1면에 야간노동자 148명의 죽음을 다룬 것이 생각났다. 노동권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